르 코르뷔지에 회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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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건축의 아버지, 르 코르뷔지에 회고전

현대 건축의 아버지라 불리는 르 코르뷔지에.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그의 전시 <르 코르뷔지에: 4평의 기적>을 다녀왔습니다.

가족의 주말 나들이 삼아 가벼운 마음으로 전시장을 찾았는데, 막상 전시장 앞에 도착해서는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전시장을 찾는 사람들이 많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이렇게 길게 줄이 늘어 있을 줄이야.

줄서서 표를 끊고 나서도 30분 이상 줄을 서야 입장할 수 있었습니다. 과연 전시장 안에서도 이렇게 줄줄이 줄을 서서 봐야하는 건가 싶어 걱정도 되었고, 도대체 어떤 전시이기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높은 관심을 보이는 걸까 싶어 의아하기도 했습니다.

 

집은 살기 위한 기계다.”

 

 

르 코르뷔지에는 20세기를 대표하는 건축가이자 타임지가 선정한 ‘20세기를 빛낸 100 중 유일한 건축가였고, 2016년 그의 건축물 중 총 17개가(7개국에 걸쳐 분포되어 있는) 한꺼번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최근 세계적인 뉴스가 되기도 했습니다. 한 번에 현대 건축 17개가 등재된 사례는 세계 역사상 이례적인 일이라고 하는데, 이번 전시도 이를 기념하여 기획된 것으로, 이번 전시에는 뉴욕 모마, 파리 퐁피두, 서울 디렉터들이 함께 참여한 프로젝트라고 합니다. 

 

 

건축은 르 코르뷔지에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합니다. 과거의 건축은 살기 위한 것이 아닌 권위와 지배를 위한 도구였다면, 르 코르뷔지에는 건축의 중심을 인간에 두고 건축의 개념을 새롭게 창안했습니다. 

 

그는 건축을 통해 모더니즘 정신을 창안, 구현했고, 현대 건축의 원칙을 세웠습니다. 예를 들어 20세기 초 미술에 피카소, 과학에 아인슈타인, 정신 의학에 프로이트가 있다면, 건축 혁명의 선두에 있던 사람이 바로 르 코르뷔지에 였습니다. 그가 창안한 건축의 5원칙은 지금까지 현대 건축의 교과서로 남아있다고 합니다. 

 

르 코르뷔지에는 전쟁 후 망가진 도시를 보며 또 산업 혁명의 영향으로 도시로 몰려든 사람들을 보며 작은 공간이라도 사람들이 편안하게 살 수는 없을까하는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시대적 어려움을 해결하려 했던 그의 건축이 바로 20세기 건축의 혁명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그는 최초의 현대식 아파트를 창안했고, 모듈러라는 사람이 움직이기에 불편함이 없는 최적의 황금 비율을 개발하기도 했습니다. 

한국에서 아파트라는 이미지는 자연이나 인간다움과는 동떨어진 개발과 부동산적 가치로 평가되는 부작용도 있지만, 아파트라는 건축의 형태가 현대 건축사에서 그러한 혁명적 인식 가운데 탄생되었다는 것이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어찌되었든 건축계의 아인슈타인, 건축에 있어서 모더니즘을 집약한 인물로 르 코르뷔지에를 다시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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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예술적 창조의 비결은 1918년부터 날마다 그린 회화 작품에 있다.”

 

이번 전시의 분량은 진짜 방대했습니다. 2시간을 꼼꼼히 본다고 봤는데도 시간이 부족하게 느껴질 정도 입니다. 건축에는 문외한이지만, 그의 청년기부터 삶의 여정을 따라 발전하는 예술의 궤적을 따라가는 것이 꽤나 흥미로웠습니다.

 

그는 건축가로 유명하지만 실제 그의 예술 활동의 근간은 그림이었습니다. 그의 생애 전반에 걸쳐 다양하고 엄청난 분량의 회화 작품들이 그의 화가로서의 일상과 성찰, 성장, 소통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실제 그는 다양한 그림 속에서 건축의 조형세계를 탐구하고 실험하기도 하고 회화를 뛰어넘어 건축으로 이를 완성시키기도 했습니다.

 

나는 매일 그림 그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나는 그림을 그리는 행위 속에서 내가 추구하고자 하는 개념을 매일 얻어냈다. 얻지 못하면 언젠가 그것들을 찾아낼 수 있을 때까지 계속해서 그림을 그렸다. 형태의 비밀, 영혼을 발전시키는 발명을 얻었다. 마치 곡예사가 매일 근육 훈련을 하는 것처럼 나도 매일 그림을 그리며 창조의 근육을 단련했다. 만약 내 건축 작품에 있어 어떤 장점을 발견한다면, 그것은 내가 매일 그림을 그리는 비밀스러운 노력에 있다.”

 

그의 방대한 회화 작품은, 그가 청년기에 여행 중 그렸던 작은 스케치 작업들에서부터 풍경, 정물 오브제, 인물 등에 이르기까지 그 자체로 충분한 힘과 예술성을 보여줍니다.

 

 

삶 자체가 하나의 건축이다.”

모든 것은 결국 사라지고 만다. 전해지는 것은 사유뿐이다.”

 

그의 예술성은 직업적 성찰로도 이어집니다. 르 코르뷔지에는 건축가는 시대의 생각을 남기는 사람이라고 말했는데요, 건축가는 건축물만이 아니라 생각을 남겨야 한다는 직업적 사명을 강조한 것입니다. 사유의 깊이까지 이렇게 훌륭할 수가...

 

전시를 관람하던 끝 무렵, 약간은 허탈하게도 그는 순탄하지 않을 것 없는 삶을 산, 20세기 건축계를 끌고 간 성공적인 예술가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타고난 재능과 직관, 힘에 더해 그는 탐구하고 성찰하고 발전하고 겸손하고 성실한 예술가로서의 모습을 그의 작품들과 그 사이사이 세세한 흔적들을 통해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군말 없이 있는 그대로 감탄하게 될 뿐입니다.

 

우리나라에 디자인, 건축, 미술 관련하여 전문가, 종사자, 전공자 등 조금이라도 업계에 관련된 사람이라면 죄다 이번 전시를 보러 온 것 같습니다. 최소한 두 겹 씩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 틈으로 전시를 관람하며 다른 이들의 오가는 대화가 자연스레 흘려 들리다 보니... 다들 전공과 관련하여 무언가 아는 체를 한마디씩은 던집니다. 

 

그렇지만 르 코르뷔지에에 대해 잘 알고 있던 전문가 뿐 아니라 그를 잘 몰랐던 사람들이라도 흥미롭게 관람할 수 있다는 점은 분명한 듯 합니다. 

 

"문제의 핵심은 명확하다. 

복잡함에 주저하지 말고 '단순함'에 도달할 것.

어느덧 잃어버린 내 인생의 '꿈'을 다시 쫓을 것.

젊은 상태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어제보다 더 젊어져 갈 것."

-르 코르뷔지에-

건축을 그리다, 르 코르뷔지에

겸손한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

겸손은 낮춤이 아니라 존중이다.

인간과 자연 그리고 인류 문명에 대한 존중

20세기 세상을 바꾼 혁신가 3인

이동혁신 헨리 포드

정보혁신 빌 게이츠

주거혁신 르 코르뷔지에

'수백만 서민의 거주지를 해결한 공동주택(아파트)을 창안해 집이 없는 이들의 삶을 바꾸다.'

2016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등재 7개국 17개 현대건축물

귀에뜨 주택(1926) 앤트워프, 벨기에

좁은 대지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직육면체의 주택

몰리토 공동주거(1931), 파리, 프랑스

인접 건물들과 연속성을 확보한 공동주거단지(위쪽 두 층은 르 코르뷔지에의집)

작은 집(어머니의 집) 1923, 코르소, 스위스

공간을 경제적, 실용적으로 배열해 '거주'의 본질에 충실한 주택

끌라떼 공동주거 1930, 제네바, 스위스

옥상정원에 거주자의 공용 공간을 설치한 공동주거단지

도쿄 국립서양박물관(1955)

사보아 저택(1928), 푸아시, 프랑스

'현대건축의 5원칙'을 완벽하게 구현해 현대식 주거의 이상을 담은 저택

카바농 1951, 로크브륀, 카프,마르탱, 프랑스

르 꼬르뷔지에 평생의 메시지를 함축적으로 담은 4평의 통나무 오두막

20세기 최고의 걸작 롱샹 성당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미스 반 데어 로에 그리고 르 코르뷔지에 세명을 근대 건축의 3대 거장이라고 합니다. 이 중에서 르 코르뷔지에는 현대 건축의 흐름에 많은 영향을 끼친 건축가 입니다. 공간에 대한 기능주의적인 시각을 불어넣었으며 그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롱샹 성당(노트르 담 뒤 오트 성당,  프랑스, 1955)이 있습니다. 

"집은 살기 위한 기계다."

"위대한 시대는 드디어 시작되었고

그곳에는 새로운 정신이 존재해야 합니다. 

이 시대의 문제와 사회적 균형을 해결할 수 있는 열정이 

바로 건축에 있습니다."-르 코르뷔지에-

아프리카 에술의 조각(1909)

춤추는 사람의 힌두 비(1908-1909)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그리고 르 코르뷔지에...

이들은 화가이자 건축가였다.

그들의 회화는 건축에서 중요한 설계도 역할을 하였다.

보스포루스 해협의 범선(1911)

"내가 스스로에게 부여한 나의 의무와 연구 과제는 

사람들을 불행과 재난으로부터 막아주고 그들에게 행복과

일상의 기쁨을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르 코르뷔지에-

"현대 건축은 르 코르뷔지에 이전과 르 코르뷔지에 이후로 나뉜다."

그리고 르 코르뷔지에의 건축은 30년대를 기점으로 전기 르코르뷔지에와 후기 르코르뷔지에로의 극적인 변화를 가진다. 

건축, 인간이 중심이다. 그리고 본격적인 건축가을 길을 가다.

르 코르뷔지에의 자화상(1917)

스스로 용기를 불어넣은 청년

1917년 르 코르뷔지에가 고향 스위스를 떠나 세계적인 도시 파리에 정착한 직후 그린 자화상이다. 

19~20세기 초반까지 파리는 세계에서 가장 유능하고 야심찬 천재들이 모여든 도시였다. 그들의 한 가지 목표는 명확했다. 

'어떻게든 살아남으리라'

정든 고향을 떠나 파리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들은 모든것을 견디고 버텨야 했다. 특별한 재주를 가진 모든 이가 불나방처럼 모여든 곳이 파리일 만큼 재주만으로는 결코 승부가 나지 않았다. 

그들이 갖추어야 할 것은 재주가 아닌 오직 실력뿐이었다. 

이 자화상에는 파리에 정착한 르 코르뷔지에의 복잡한 심경이 담겨 있다. 큰 세상을 처음으로 맞딱뜨린 청년의 기대와 두려움 등 여러 감정이 섞인 솔직한 내면이 드러나 있다. 

르 코르뷔지에게 파리는 생각보다 너무나도 큰 도시였다. 마땅히 일도 없었고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 돈을 벌기 위해 건축자재 사업을 시작했으나 4년 만에 도산했다. 

그는 자신에게도 전 세계의 천재들이 모여든 파리라는 도시에 어울릴만한 '이름'과 '외모', 그리고 국제적 감각에 어울릴만한 '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후 자신의 모든 것들을 혁신하기 시작했다.

이름을 본명 '샤를 에두아르 잔느레'에서 그의 외할아버지 이름에서 따온 '르 코르뷔지에'로 개명했다.

또한, 공식적인 자리에는 반드시 '나비넥타이와 수트'를 정중히 챙겨 입었다. 그의 '동그란 안경'도 이미지 메이킹의 핵심소재가 되어 트레이드마크로 자리 잡았다. 

 

르 코르뷔지에는 완성된 건물의 비례를 검증하는 '규준선'이 건축설계 단계부터 미리 적용되어 체계화되면 편리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는 우선 조각과 회화에서부터 비례를 찾는 연구를 하기 시작한다. 그 생각은 결국 모듈러를 발명해내는 계기로 발전했다. 그의 정물화에서 찾아볼 수 있는 규준선은 편안한 비례로 균형감을 주고 있다. 

살아 있는 건축'건축적 산책로'

"건축은 걷고, 달리면서 만날 수 있는 존재다. 

그것이 살아있는 건축이다."

-르 코르뷔지에-

건축이 만들어 놓은 동선을 따라 외부와 내부가 연쇄적으로 교차하면서 전개되는 통로를 이동할 때마다 사람들은 마치 산책하듯 다른 시선, 다른 풍경을 경험하는 것을 '건축적 산책로'라고 한다. 

건축적 산책은 건물의 외형을 바라보기만 해서는 경험할 수 없다. 단순히 기능적인 동선체계만을 의미하는 산책로가 아니기 때문이다. 

감정적인 측면에서 공간, 시간, 사람이 일체 되었을 때 체험할 수 있는 산책이다. 

건물 입구에 접근해서 출발하여 건축물이라는 '공간'속에서 돌아다니는 '움직임'이 있었을 때 비로소 시시각각 새로운 장면과 조우하게 된다. 

이렇듯 파노라마와 같이 펼쳐지는 감성적인 측면의 산책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르 코르뷔지에가 의도하는 대로 모둘러에 의해 치밀하게 설계되었다. 

르 코르뷔지에의 프리젠테이션

강의명 "교육의 한계를 뛰어넘는 자유로운 생각"

1929년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문화의 중심으로 만들려 했던 젊은 예술가 그룹은 당대에 인정받고 있던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에게 특별 강의를 부탁했다. 강의는 대규모의 도시계획에서부터 현대미술, 디자인까지 다양한 주제를 넘나들었다.

사보아 저택, 프랑스(1928)

모듈러

더 저렴한 비용으로 최소한의 공간을 활용해 최대 효과를 낸 '편안한 공간'

제한된 좁은 공간에서도 사람에게 딱 맞는 편안함을 느낄 수 있도록 최적의 수치를 찾기 위해 고민했다. 그리고 기준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 기준은 바로 사람의 '몸'이었다. '몸'을 기준으로 사람이 팔을 들어 올린 높이가 건축의 핵심이 되었고 최적의수치는 연구의 목표가 되었다. 인간이 최소한의 공간에서 움직임에 불편함이 없는 최적의 비율을 찾아 발명한 비례에 대해 아인슈타인은 '세상을 바꿀만한 연구'라고 극찬했다. 최초의 대규모 현대식 아파트인 유니테 다비타시옹(1947-1952)에 적용된 모듈러는 183cm 키의 남성을 기준으로 팔을 들어 올린 높이 226cm를 도출해 냈다. 

'모듈러'는 어려운 환경에 처한 인간을 위한 배려에서 시작됐다. 끊임없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결국 전 세계가 지금까지도 유용하게 활용하는 위대한 건축적 도구이자 건축의 기준으로 귀결됐다. 모듈러 이론에 입각한 르 코르뷔지에 건축물은 2016년 세계문화유산에 17개의 건축물이 등재되어 시대적 난제를 건축으로 해결한 그의 생각이 승리했음을 인정했다. 

1928-1930년대 회화

이 시기의 르 코르뷔지에 회화 작품에서 자신의 건축 작품에서와 마찬가지로 미적 언어가 새롭게 등장하는 시기이다. 단순했던 순수주의 회화의 형식으로부터 멀어져 보이고, 사물의 왜곡과 복잡한 형식적 유희가 펼쳐진다. 이것은 그가 철저하게 자신의 영감을 표현하는 수단이 되어주었던 유기적이고 구체적인 세계를 주목했기 때문이다. 

20세기 최고의 건축물 '롱샹'

그는 건축에서의 거짓을 싫어했다. 르 코르뷔지에에게 지난 전쟁 동안 폐허가 된 롱샹 언덕 위의 성당 재건 요청이 들어왔다. 하지만 그는 단번에 거절했다. 그는 교회나 수도원 같은 종교 건축물을 해 본 적이 없었을 뿐 더러 개신교를 믿는 스위스 가정에서 태어났다는 이유에서 였다. 

또한 그는 신이 존재하는지 아닌지 알 수 없다고도 생각한 회의론자이기도 했다. 르 코르뷔지에는 "아니요, 저에게는 교회를 지을 권리, 게다가 가톨릭 성당을 지을 권리는 더더욱 없습니다." 

어느날 그가 집으로 나를 불렀다. "신부님은 내가 성당을 지어주기를 바라고 계시지만, 난 그러고 싶지 않다네, 보겐스키, 자네도 오게. 와서 점심에 함께 참석해주면 좋겠네."

감동 없이는 회상할 수 없는 그날, 나는 역사적인 대화에 참석하게 된 셈이었다. 르 코르뷔지에는 벽을 마주 보고 신부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저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르 코르뷔지에, 우리에게는 진정으로 인간을 이해하는 예술가가 필요합니다. 당신은 예배당에 오는 신자들에게 미적감동과 종교의 숭고함마저 느낄 수 있도록 해 줄 유일한 사람입니다."

신부의 두 눈은 뜨거운 열정으로 가득했다. 신부의 설득에 결국 그는 롱샹 성당을 맡게 되었다. 그것이 세기의 걸작으로 남게 될 줄 상상하지 못한 채. -앙드레 보겐스키-

현대식 아파트의 시초

모듈러 수치에 의해 1952년 프랑스 남동부 마르세유에 지어진 12층 규모의 '유니테 다비타시옹'.

얇은 바닥과 기둥, 계단을 이용한 건축방식의 콘크리트 건축물은 20세기 전 세계 주거공간을 바꿨습니다. 

부인, 이본느 르 코르뷔지에의 초상

탁자위의 여인과 편자

누워있는 두 여인(1940)

건축의 곡선 연구 '인체'

악기에서 여성의 인체까지 곡선을 찾다

르 코르뷔지에의 여인들에 대한 회화는 초기에는 서있는 자세에서 후기로 갈수록 누워있는 자세로 변하게 된다. 누워있는 여인의 몸의 굴곡은 악기의 곡선으로 보이기도 하고, 몸과 배경을 이루는 자연과 하나가 되어 보이기도 한다. 이것은 대지, 바다, 하늘과 같이 자연을 바라보는 것과 같은 시각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누워있는 여인의 몸의 굴곡에서 느끼는 아름다움은 마치 롱샹 성당의 진입로의 굴곡에서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감흥을 느끼는 것과 같다. 

애플사의 스티븐 잡스가 아이패드 발표회장에서 앉아 유명해진 르 코르뷔지에의 가죽 소파 'LC2'

르 코르뷔지에가 파리에 정착한 1917년 부터 사망한 해까지 49년 동안 사용한 이젤.

트래이드 마크가 된 동그란 뿔테 안경과 팔레트

친애하는 피카소에게

르 코르뷔지에는 피카소와 함께 현대 예술 논쟁의 한복판에 서 있다. 피카소와 함께 현대 미술을 주도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재미있는것은 그동안 예술비평은 그를 건축가로서만 부각하고는 화가로서의 모습은 애써 피하려 했다는 사실이다. 그가 건축가로서의 업적이 워낙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작품 중 하나인 그의 회화를 모른척 한다는 것이 더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다. 그의 건축 작품은 바로 회화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제도판 위에서 보다 캔버스 위에서 바로 그 건축 작품들이 태어난 것이다. 쟝 프티<르 코르뷔지에,그 자신> 중에서

전시장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지중해의 푸른 바다와 피아노, 그리고 편안한 휴식공간

전시 마지막으로 르 코르뷔지에가 생을 마칠때 까지 살았던 집,  르 코르뷔지에 부부는 이곳을 '작은 궁전'이라 불렀습니다. 

르 코르뷔지에가 생애 말년에 살았던 집으로 세계에서 가장 작은 세계문화유산입니다. 좁지만 움직이기에 불편하지 않도록 르 코르뷔지에의 모듈러 이론이 반영돼 있으며, 그가 평생 연구한 '비례'를 체험할 수 있는 공간입니다. 원작과 단 1cm도 다르지 않게 만든 이 집은 세상에 단 하나 허락된 기적입니다. 이 4평짜리 작은 집을 전시하기 위해 이탈리아 장인들이 일주일에 걸쳐 조립해 예술의 전당 전시실에 설치했다고 합니다. 도시계획가이며 건축가인 르 코르뷔지에가 평생을 통해 남기고 싶은 메시지를 압축한 곳으로 우리에게 '집이란 과연 무엇인가'에 관한 질문을 던집니다. 

4평의 공간에서 기적을 남기다.

르 코르뷔지에는 1965년 8월 27일 프랑스의 지중해안 로크브륀카프마르탱에서 수영하다 78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인간에게 가장 절실한 것 중 하나, 건축 이것은 행복한 사람들이 만들어 냈고, 행복한 사람들을 만들어 낸다. 행복한 도시에는 행복한 건축이 있다." -르 코르뷔지에-

수많은 명사들이 남긴 방명록

건축과 예술을 통해 '전신'을 남기고 싶어 했던 르 코르뷔지에, 그는 이번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로 사망51년만에 비로서 그의 작품들이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귀중한 가치를 지녔음을 인정받았습니다. 이로써 그가 남긴 건축, 회화, 조각, 글은 인류 최고의 브랜드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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