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 최악의 전투 현리전투
방태산, 푸른 원시 능선에서 발견한 기억의 파편
오래전, 강원도 인제 방태산에서 찍었던 사진 한장이 생각났다.방태산 깊은 능선 한가운데서 '배달은석'이라는 바위에서 발견한 녹슨 박격포탄, 1000미터가 넘는 이 높은 산정에도 한국전쟁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았다.
버린것인지 불발탄인지 모를 빨갛게 녹슨 박격포탄. 참혹했던 51년 5월의 어느날, 공포와 굶주림속에서 붉은피 흘리며 이 능선을, 이 산속을 걷고 또 걸었을 수 많은 꽃들을 떠올려 본다.
오늘을 걷는 나에겐
능선 멀리서 들려오는 휘파람새의 청명한 울음소리와
5월 자욱한 안개속 연분홍 철쭉의 꽃잎
능선을 타고 넘는 시원한 바람
호사스런 산으로서...
그 옛날 그대들에겐
적막을 깨는 죽음의 총탄소리와
칠흑같은 어둠을 밝히는 달빛의 공포
능선을 타고 넘는 매캐한 화약 냄새
전우가 쓰러져간
전장으로서...
방태산 배달은석에서 발견한 한국전 당시의 녹슨 박격포탄
이곳 방태산은 1951년, 5월 17일 부터 25일 사이 강원도 인제 현리에서 벌어진 중공군과 한국군3군단과의 치열했던 전장터 였다. 일명 '현리전투'라고 한다.
17일 밤, 중공군에게 점령당했던 오마치고개의 공격을 준비하던 한국군 3군단의 두개 연대가 어이없게 후퇴하는 것을 계기로 3군단 전병력이 남쪽을 향해 방태산으로 철수를 시작한다.
군단 지휘부와 사단 지휘부가 먼저 도주를 시작하면서 전 군단이 패닉에 빠져 일시에 오합지졸이 되고 말았다. 말이 철수지 지휘체계와 기강을 상실한채 고급장교부터 병사까지 산을 향해 달아났다.
방태산을 가득 매운 국군을 향해 인민군과 중공군이 추격을 했고 국군은 소총과 장비도 버린 채 도주한 병사가 많았다.
당시 9사단장 최석 등 일부 고위 장교들은 수치스럽게도 계급장을 떼고 도주했으며, 이견이 많지만 군단장 유재홍 역시 연락기를 타고 도망쳐 중군군이 포위한 사지에 부하들을 내버렸다고 한다.(나중에 유재홍 장군은 현리에서 작전회의를 마치고 군단사령부로 복귀하는 길이었다고 주장했다.)
이에 3군단은 3일 동안 무려 70km를 도망쳐 '하진부'에서 겨우 수습됐지만 살아남은 병력은 4만명 중 절반인 2만명 뿐이었다. 2만명은 포로가 됐거나 중공군에게 사살 당하고 말았다.
포위된 3군단이 제대로 된 저항조차 해보지 못하고 겁에 질려 마구 도주한 사실은 그 어떤 변명으로도 용납하기 어려운 3군단 지휘부의 과오였다.
인민군의 절대 우위 속에서 38선에서 50Km에 불과한 서울까지는 평지였음에도 불구하고 인민군이 서울에 들어올 때 까지 3일이나 걸렸다. 그에 비해 평지도 아닌 산악지대를 3일만에 무려 70Km나 내줬다는 사실만으로 '현리전투'는 전투가 아닌 치욕스런 도주였으며 (1597)정유재란-칠천량해전, (1636)병자호란-쌍령전투와 함께 한국전쟁 현리전투는 한국사 3대 최악의 패전 가운데 하나로 기록된다.
현리전투의 지휘를 맡았던 유재홍 3군단장은 그 뒤, 참모차장에 중임됐고, 군사령관에다 제3대 합참의장까지 역임한것도 모자라 박정희 정권때는 국방부장관까지 지냈다.
3군단의 도주와 해체의 당사자이면서 '전시작전권'을 미군에게 빼앗기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유재홍 장군에 대한 인사는 그 어떤 이유로도 쉬이 납득되기 어렵다.
참혹한 패퇴의 시발점이 됐던 오미재 고개 (옛 오마치고개)에 '현리전투 위령비'가 방태산을 뒤로한채 세워져 있다. 이 자리는 현리전투 당시 희생이 가장 많았던 곳이며 전사자들을 화장했던 장소라고 한다.
현리지구 전투위령비의 건립취지 현리 지구 전투는 중공군 제2차 춘계공세 기간 중이던 1951년 5월 16일부터 22일까지 실시된 전투다. 당시 춘천ㆍ 인제ㆍ설악산ㆍ속초를 잇는 선에서 대치한 가운데,적1개사단 규모가 전술적 요충지인 오미재 고개를 점령하여 아군의 퇴로를 차단했고, 결국 아군은 전ㆍ후방 으로부터 적의위협을 받아 현리~하진부리를 거쳐 영월로 철수를 하게 되었다.이러한 가운데 이곳 현리지구 전투에서만 19,000명의 선배 전우들이 전사, 포로, 실종 되었거나 부상을 입는 등 처절한 패배를 당했고,이로인해 5월26일에는 불명예 스럽게도 군단이 해체되는 비운을 겪게 되었다. 우리 후배 장병들은 당시의 처절한 전투에서 패배의 아픔을 뼈아픈 교훈으로 상기하고 초개와 같이 산화하신 호국영령들을 위로하고자 현리지구 전투에서 희생이 가장 많았고 선배전우들의 시신을 화장했던 바로 이 자리에 군단 전 장병과 지역주민들의 뜻을 모아 1991년 11월 20일 위령비를 건립한 후 매년 주요 행사시 참배하면서 당시의 쓰라린 전훈을 되새기고 있다. 오늘을 살아가면서 과거의 아픔을 교훈으로 삼아 다가오는 미래에 지혜롭게 대처하지 못한다면 지난 날의 비극은 언제든지 되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고통과 시련의 역사가 부끄럽고 수치스럽다 하여 숨기려 하기 보다는 이를 와신상담의 계기로 삼아 우리조국 대한민국을 위협하는 어떠한 적의 도발도 반드시 격퇴할 수 있는 군으로 거듭날 것을 다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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