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령전투와 남한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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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과 남한산성 그리고 쌍령전투

남한산성 하면 생각나는것이 무엇일까요? 저는 병자호란과 인조, 삼전도의굴욕, 쌍령전투 같은 비참했던 역사가 떠 오릅니다. 며칠전 남한산성과 왕이 거처하던 행궁을 돌아봤는데요, 그곳에 있는 내내 어질지 못한 임금과 아첨하는 신하가 떠오르고 무참히 짓밟히고 처참히 숨져간 백성들의 모습이 오버랩 되더군요.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했습니다. 병자호란과 삼전도굴욕, 쌍령전투 처럼 처참한 우리의 역사는 교과서에도 자세히 기록하지 않습니다. 역사는 누군가의 주관으로 좌우되어서는 안되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입니다. 아프고 비참한 역사도 역사 입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인조가 이곳 행궁에서 47일 동안 불안속에서 잠못이룬 날을 보냈던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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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병자호란-남한산성-쌍령전투-삼전도굴욕        

1636년 청 태종이 12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하면서 병자호란이 발생합니다. 순식간에 압록강을 돌파한 청군은 평양을 지나 열흘만에 조선의 수도 한양에 들어섭니다. 청군의 기세에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 하려했으나 청군에 막혀 남한산성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곧이어 청의 대군이 남한산성을 포위하고 인조는 고립되고 맙니다. 이때, 남한산성을 지키는 조선의 군사는 불과 1만3천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남한산성에 고립된 인조는 전국에 근왕병의 모집을 명령하게 되는데요, 지리적으로 가까운 거리에 있던 강원도, 충청도에서 진군하던 근왕병들이 청군에게 줄줄이 패전을 당해 남한산성에 오지도 못한채 후퇴하거나 와해 되어 버렸습니다. 다행이 경상좌우도에서 모집된 근왕병들은 영남대로를 지나 문경세제와 충주를 넘어 경기도까지 이르는 고된 행군 끝에 도착하게 됩니다. 이때 근왕병으로 모집된 병력은 대략 4만 정도였다는 추측이 유력합니다. 남한산성이 포위된 지 2주가 지난 12월 30일, 경상 좌병마사 허완과 우병마사 민영이 이끄는 조선군은 지금의 3번 국도가 지나는 경기도 광주 인근 쌍령고개에 도착한 후 고개 양쪽에 목책을 세우고 진을 치게 됩니다. 

 

쌍령참사는 이때부터 시작됐습니다. 경상 좌병마사 허완의 군사는 청의 척후병이 쌍령으로 접근하자 잔뜩 긴장한 나머지 조총을 연속 방포해 소지한 화약을 일거에 소진하고 말았다고 합니다. 총탄이 없는 조총은 말 그대로 쇠막대기에 불과 한 터, 화약을 더 달라고 우왕좌왕 하던 틈을 타고 목책을 뛰어 넘은 청군에게 어이없이 붕괴되고 맙니다. 조선군의 대부분은 도망가다 압사당했거나 절벽에 떨어져 죽는이가 더 많았다고 합니다.   

 

이에 비해 경상우병마사 민영의 진영은 비교적 훈련이 잘된 군사들이어서 조총으로 청군을 잘 저지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또 다시 포수들의 화약이 동나버리고 설상가상으로 화약이 폭발해 순식간에 혼란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이에 청군의 기병 300여기가 일제히 조선군의 진영으로 들어오자 역시 도망가다 밟혀 죽고 추락해 죽은 조선군이 대부분이었다고 합니다. 기록에 의하면 청군의 병력은 300명이었다고 하지만, 이는 기병이므로 육군의 수와 1:1로 비교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4만이라는 압도적인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전투도 벌이지 못하고 괴멸당한 병자호란 쌍령전투는 임진왜란 칠천량해전, 한국전쟁 현리전투와 함께 조선 최악의 3대 전투라는 오명을 가진 채 역사에 길이 남고 있습니다. 쌍령참사 이후 한달이 되지 않은 1월30일, 인조는 청 태종에게 항복하고 '삼전도의 굴욕'을 겪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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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 최악의 전투 [현리전투]

 

 


 

7세 이상은 1,000원, 18세 이상은 2,000원의 입장료를 받고 있습니다. 주차는 행궁앞 주차장에 시간제한없이 1,000원에 주차 할수 있습니다.  

 

시간이 맞으면 문화해설사의 행궁 해설도 함께 들으면 좋을것 같습니다. 단지 눈으로 둘러 보는것 보다 조목조목 해설을 들으면 피상적으로 보이던 것들도 오랫동안 잊혀 지지 않게 되더군요. 

 

 

10년의 복원기간을 거쳐 2012년 완성된 남한산성 행궁의 안내도 입니다. 

 

한남루를 지나면 너른 마당에 투호던지기와 널뛰기가 있는 전통놀이 체험장이 있습니다. 널뛰기는 어릴때는 곧 잘 뛰었던것 같았는데 마음같이 잘 뛰어 지지 않더군요. 

 

행궁의 정문인 한남루를 지나면 너른 공터가 있고 그 옆으로 연못이 나옵니다.

 

 

임금이 도성 밖으로 행차하는 것을 행행(行幸)이라 하는데요, 행행은 당일로 끝나기도 하지만 선왕의 능행이나 휴양, 또는 전란으로 인해 며칠이 걸리기도 합니다. 이럴때 임금이 임시로 거처하던 곳이 행궁입니다. 특히 남한산성의 행궁은 전란이나 능행시 이용됐을뿐 아니라 유일하게 종묘와 사직을 갖춘 곳으로 전란같이 유사시에 임시 수도의 역할을 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남한산성 행궁으로 들어가며 외삼문을 통해 본 외행전의 모습입니다. 병자호란 당시 왕이 병사들에게 음식을 베푸는 '호궤'를 이곳에서 했다고 합니다. 

 

남한산성행궁은 전쟁이나 내란시 후방의 지원군이 도착할때 까지 한양도성이 궁궐을 피신할 피난처로 사용하기 위해 인조 4년(1626년)남한산성과 함께 건립됐습니다. 실제로 인조 14년(1636년)병자호란이 발생하자 인조는 47일간 남한산성으로 피난해 있기도 했습니다.

   

임금의 침전인 내행전, 정면7칸에 측면4칸으로 전체 28칸 전각이다. 담으로 둘러쌓아 부속시설을 담 밖으로 설치한 폐쇄적인 구조가 특징입니다. 

 

내행전의 중앙 마루, 뒤로 경복궁,창덕궁,창경궁,덕수궁에도 있는 일월오봉도가 있습니다. 

 

내행전에 있는 방입니다. 

 

내행전 왕의 침소입니다.

 

1892년3월경, 한남루의 모습입니다.

 

1909년 촬영한 남한산성 내부의 광주읍 모습입니다.

 

일제강점기때 남한산성의 전경입니다. 

 

행궁 가장 뒷쪽에 있는 느티나무 입니다. 나무의 뿌리박음이 병자호란까지 거슬러 가지는 않았겠지만, 그래도 몇백년의 유구한 세월을 당당히 버티며 남한산성과 행궁의 소멸과 복원을 모두 지켜봤겠죠. 그렇게 아픈역사의 공간이 지금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됐습니다. "역사를 알지 못하면 다시 그 역사를 되풀이 하게 된다"라는 말이 떠 오르는 남한산성 행궁 방문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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