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회리 우태옥 이장의 옥순봉 자락에 묻은 애절한 고향 생각
장회교를 건너 도로를 따라 계란재로 걸어올라 가다 보면 이상한 조형물들이 있는 민가가 있다. 지금은 빈 집이지만 충주댐으로 수몰되기전 장회리라는 마을의 우태옥 이장님댁이다.
86년 충주댐의 만수로 마을은 수몰됐고 마을 사람들은 다른 지방으로 이주하거나 인근으로 이주단지로 이사를 했다. 하지만 마을에서 높은 지대에 살고 있었던 이곳 이장님댁은 수몰되지 않았다.
그는 집 앞에 국가적 개발이라는 미명아래 고향을 수장시키고 쫒겨가듯 떠나야 했던 수몰민들의 애환과 당부를 구구절절 돌에 새겨 놓았다. 그리고 수몰민들이 언제든지 모여 옛이야기 나눌수 있는 고향으로 만들었다.
이곳은 유일하게 수몰되지 않은 장회리 수몰민들의 영원한 고향이다.
시멘트로 만든 촛대와 손, 자갈로 만든 마을자랑비와 염원탑
지난 세월 많은 명인들이 살았고 각양각색 명승명소 흔적들도 많았는데 충주댐물 잠기어서 그 흔적들 다 감추고 이 고장에 70가구 마을마져 잠기었네 실향민의 그 아픔을 그누가 아시리오.
오늘날도 저물속엔 그옛날을 그리면서 하염없는 그것들이 눈시울을 적시네요 있는 정성 다하여서 이표석을 세우나니 후세들은 이고장을 조화롭게 가꾸어서 오신손님 찾는분들 모든기쁨 주시게나. 1992년 8월 18일 장회리장 우태옥 만들고 글 씀.
'우리집 그사람', 부인에게 바치는 헌정시인가보다. 이장님 부부는 이곳에서 돌아가실때 까지 사셨던것 같다.
평강공주와 온달장군 장성,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극진히 위했던 마음이 느껴진다.
할아버지가 쓴 '우리집 그사람'
17세에 어린나이 우리집에 시집와서 없는살림 식생활에 어려움도 많았으며 못산다는 업신여김 무엇이라 위로할까 온갖고생 무릅쓰고 그의힘을 다하였지
내년이나 후년에나 한해두해 희망걸고 유수같은 세월따라 칠남매를 길러냈지 그순간에 뒷바라지 더할말이 있으리요 온갖고생 마다않고 그네들을 길러냈지
농사일을 하러갈땐 쟁기지고 소를몰고 남들가는 여행길은 자가용차 부부동반 우리내외 가는길은 버스만을 의지하니 오랜시간 기다릴땐 미안하고 부끄럽소
고생끝에 영화란것 누구찾아 가는건지 오랜세월 당뇨병에 고생하는 그모습은 측은하고 애석해라 마음둘바 모르겠네 좋은남편 만났으면 호강스레 잘살건만…
2010년 6월, 우편함에는 아직 빛바래지 않는 우편물이 담겨 있다. 2007년 하순에서 2008년 사이 빈 집이 된것 같다.
지구상에 장회리요 단양땅에 장회리다. 세상에서 가장 큰 마음의 고향이자 집이다.
주인은 떠났지만 새까만 글씨에 박힌 '우태옥'이라는 이름은 아직 건재해 보인다.
매년 한번 이곳에서 장회리 출신 가운데 살아 있는 사람들은 다 모였다고 한다. 이 날은 고향 잃은 수몰민들에게는 자유와 해방의 날이라고도 했다. 서로가 가슴깊이 쌓인 한을 보듬어 주며 울기도 하고 웃기도 했다. 그러나 점차 고령이신 분들이 한 두분 세상을 떠나고 있어서 모임에 참석하는 사람이 적어진다고 아쉬워 했다. 이제는 이장님마져 돌아가시고 텅 빈 폐가가 되어 아무도 찾는이가 없다.
근면 자조 협동의 새마을 정신을 발휘하여 지역사회발전에 기여한 공이 크므로 표창 1979년 내무부장관 김종환.
새마을지도자 재임시 새마을운동에 솔선참여 헌신적 노력으로 마을발전에 크게 마지했으므로 표창함 1979년 단양군수 최만식.
본교에 만10년간 충실히 근무하고 본교 발전에 공헌함이 크므로 감사장을 드림 1971년 두항국민학교 육성회장 유연.
투철한 애국심과 확고한 국가관을 가지고 국가산업과 경제발전에 많은 공헌을 하고 특히 향토예비군 육성발전에 적극지원 협조하시어 향토 방위에 이바지한 공로가 지대하시어 감사장을 드림 1971년 제2회 예비군의날에…
범죄없는 마을 지정패.
99년 6월13일자 한국 산악신문에 우태옥 이장의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
99년 당시 할아버지의 모습. 살아계셨다면 지금 84살이 되신다.
명승 명소 각광받던 우리마을 장회리가 수몰에다 국립공원 남김없이 묶이었네로 시작하는 '우리마을 장회리'등 많은 시를 발표한 농부이자 시인이다. 우태옥 이장의 바람은 구담봉과 옥순봉 자락에서 정을 나누며 살던 마을 주민들이 다시 모여 오순 도순 정답게 사는 것이었다.
단양군 단성면 장회리는 85년 이전까지 70여 가구, 4백여명이 모여살던 제법 큰 마을의 주민들이 뿔뿔이 흩어지게 된 것이 충주댐이 건설되면서 부터다. 서슬퍼런 군사정권은 댐이 건설되면 마을이 잠기니 모두 떠나라고 했고 주민들은 아무 소리도 못하고 정든 고향을 등지게 되었다.
정부는 일반매매가 보다 못한 액수를 땅값이라고 보상해줬고 그것이라도 받아들고 떠났다고 한다. 우태욱 이장도 처음에는 '나만 남아 뭐 하나'라는 생각에 떠날 생각도 했지만 일곱살 나이에 부친의 손에 이끌려 자리잡은 이곳이 고향이라는 생각에 홀로 마을에 남게 됐다고 한다.
충주댐이 완공되자 여울과 소가 어우려져 흐르던 강은 거대한 폭의 댐호로 변해 흐름을 멈추었고 논과 밭은 물밑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우태옥 이장에게 남은것이라고는 그의 땅이 '월악산 국립공원' 부지로 묶이게 되어 농사조차 제대로 짓지 못할 정도의 심한 규제 뿐이었다.
국회에 찾아가 억울함을 호소하고 집회에도 참가하는 등 자신의 삶의 터를 묶고 있는 규제를 완화하기 위한 싸움을 벌였지만 달걀로 바위치기나 다름없었다. <한국산악신문발췌>
우리가 유람선에 올라 구담봉과 옥순봉의 경치에 놀라고, 충주의 아름다움에 취했을때 이곳 장회나루터 수풀속에 가려진 시골집에서는 고향과 농토를 물속과 국립공원에 고스란히 뺏기다 시피 내어주며 마을과 고향사람들을 그리워하며 평생을 사셨던 한 할아버지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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