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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500년, 비운의 궁궐 덕수궁

국내여행/서울 by 심심한사람 2016. 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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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새로운 역사의 출발.   

조선왕조 500년의 시작이 경복궁이라면 그 끝은 단연 덕수궁입니다. 덕수궁은 원래 궁이 있던 자리는 아니었습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선조가 경복궁을 버리고 의주로 도망가자 분노로 백성들이 도성의 모든 궁을 불태웠습니다. 왜란이 수습되자 다시 도성으로 돌아온 선조가 간 곳이 지금의 덕수궁 자리에 있던 월산대군의 집입니다. 월산대군은 세조의 손자인데요 이미 성종19년 1488년에 죽고 그의 증손이 살고 있었을 때입니다. 

 

 임금이 정사를 보던 '중화전'전각입니다. 

 

선조는 월산대군의 집에서 16년을 살다가 1608년 이곳에서 죽었습니다.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즉조당에서 등극하여 머물다가 광해군3년(1611년)창덕궁으로 옮기면서 이곳은 '경운궁'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습니다. 

그리고 경운궁이 다시 궁궐로 사용된 시기는 조선말 '아관파천(1896년)'때문인데요,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상황에서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고 왕실 가족은 경운궁으로 옮겨 살게 된 것입니다. 그 뒤 고종은 경운궁의 전각들을 복구하고 증축해서 1년여 만에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거처를 완전히 옮기게 됩니다.  

1880년대부터 경운궁터의 일부를 서구 열강에게 공사관 부지로 떼어줬기 때문에 경운궁 주위는 그때부터 각국 공사관이 애워싸고 있는 형국 이었습니다. 고종이 미국·러시아·영국·프랑스의 공사관이 밀집해 있는 경운궁, 즉 덕수궁을 선택한 것은 정치적으로 일본제국의 영향력을 견제하기 위한 외교적인 포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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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요일은 모든 궁이 쉬는날입니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로 외교권을 빼앗긴 고종은 2년뒤인 1907년 일본의 압력으로 순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태황제로 물러앉는데요, 왕위를 물려 받은 순종은 태황제 고종의 궁호를 덕을 누리며 오래 살라는 의미로 '덕수'라 정했으며 그 해 11월 창덕궁으로 이궁하면서 경운궁을 고종의 궁호를 따서 덕수궁으로 부르게 됐습니다.

 

 

덕수궁은 1907년 국가의 실권을 잃으면서 사실상 궁궐로서의 권위를 상실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게다가 1919년 1월 함녕전에 머물던 고종이 승하함으로써 덕수궁은 주인 없는 빈 궁궐로 지내다 1933년에는 일제의 중앙공원으로 바뀌었고 일제의 고관대작들이 묵고 가는 여관으로 쓰이기도 하다가. 도로가 뚫리고 궁이 해체하는 것도 모자라 많은 전각이 헐리고 학교와 일본식 건물을 세우는 등 궁궐이 있던 자리는 도로확장과, 학교 신축 등의 이유로 계속 잘려 나갔습니다. 이렇게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으며 덕수궁의 궁역과 건물들은 훼손과 퇴락을 거듭하며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만원으로 4대궁과 종묘까지 모두 관람 할 수 있는 '궁궐 통합관람권'을 구입했습니다.4천원이 절약되며 유효기간은 한달입니다. 한양 도성의 궁궐은 경복궁에서-창덕궁-창경궁-종묘-덕수궁 순으로 돌아보는 것이 움직이기 편하고 이해하기에도 편할 것 같습니다. 

 

 이단 월대 위에 정사를 보던 중화전과 넓은 박석으로 뒤덥힌 조정에는 품계석이 줄지어 늘어서 있습니다. 

 

 조정에 줄지어 있는 품계석, 각각의 신하들이 서야할 위치를 표시해 놓은 돌입니다.

 


덕수궁은 조선의 마지막 궁궐이자 서구 문물을 받아들여 현대와 고전미가 조화된 유일한 궁이기도 합니다. 

 덕수궁 석조전은 고종이 침전 겸 편전으로 사용하기 위해 만든 서양식 석조건물입니다. 옆쪽의 석조전 서관은 현재 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덕홍전의 뒷편입니다. 이건물은 고위관리와 외교사절을 접견하던 곳입니다.

 

덕홍전 왼쪽에는 고종의 침소로 사용된 함녕전이 있는데요, 이곳에서 고종이 의문의 죽음을 당하신 곳이기도 합니다.

 

 덕수궁 내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2층 목조 건물인 '석어당'입니다. 그 오른쪽에는 월산대군의 사저였던 즉조당이 있습니다. 임진왜란 후 선조가 16년을 사용하다 이곳에서 죽었죠. 

 

석어당은 옛날 임금의 집이란 뜻입니다. 바로옆의 즉조당은 임금이 왕위에 오른 집이란 뜻으로 광해군과 인조가 이곳에서  즉위식을 가졌다고 합니다. 인목대비가 폐위 당한 후 이곳에 유폐됐고, 광해군을 폐위하고 인조반정에 성공한 역사적인 공간이기도 합니다. 1904년 화재로 소실되어 다시 중건한 건물입니다. 

 

석어당의 왼편에는 오래된 살구나무가 있습니다. 7월이면 노란 살구들이 바닥에 떨어진 모습이 꽤나 이채롭습니다. 

 

덕수궁은 국운이 쇠퇴해 지자 외세에 의해 이리 찢기고 동강나며 헐리는 건물이 많았지만 사진의 담장만은 원형 그대로라고 합니다. 담장에 난 문은 어진사람이 출입한다는 뜻에서 유현문(有賢門)이라 이름 짓고 윗부분을 무지개 모양으로 둥글게 만들었습니다.

 

 궁궐이 쉬는 월요일을 제외하고는 매일 11시, 14시, 15시30분에 수문장 교대의식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수문장교대의식은 궁궐의 문을 지키는 수문군들이 교대를 하는 의식으로 궁성문 개폐의식. 궁성 수위의식, 행순(순라식)등이 있습니다. 

 

 수문장교대식이 열리는 시간이 되면 외국관광객들이 먼저 찾아와 기다리고 있습니다.

 

 

 

끝까지 일제에 저항했던 고종의 갑작스런 죽음은 사실상 조선의 종말이었지만, 새로운 역사의 시발점이기도 했습니다. 고종의 죽음이 3.1 만세의 도화선이 됐고, 임시정부수립 등 대한민국 정통성의 초석이 됐습니다. 

그런데 이완용 같이 나라의 주권을 팔아먹은 민족반역자들과 그 후손들이 여전히 사회의 기득권을 행사하고 역사를 왜곡하고 미화하며 그 세력을 확장해 나가고 있습니다. '역사는 승자의 편'이라는 말에 쉽게 반박하긴 힘들지만, 그들이 승자일까요? 진정한 승자는 더 많이 갖는게 아니라 더 많이 나누는 것이라고 합니다. 

 

요즘 1945년부터 1999년까지 55년의 한국 현대사를 입체적으로 조명하는 강준만 교수의 <한국 현대사 산책>이라는 책을 읽고 있는데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욕망을 채우고 모든 이들을 자신의 발 아래 굴복시키는 것이 진정한 승자이고, 그 승자들의 역사에 화려한 색을 덧 입힌 한국 근현대사를 다시 보고 다른 시각으로 생각 할 수 있게 하는 좋은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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