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문형무소, 살아있는 역사책_첫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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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0년에 돌아보는 서대문 형무소

 

올해가 일제의 강압으로 부터 벗어난지 70년 되는 해이다.

스스로의 독립이 아니었던 까닭에 나라가 분단됐고, 독립활동을 파괴하고 일제에 아부했던 민족반역자들의 기세가 여전히 등등한 지경이지만 치욕의 역사를 바로 알아야 하기에그리고 우리 아이들에게 똑바로 보여줘야 하기에 잔혹했던 일제의 억압과 만행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서대문 형무소로 갔다. 


 

 

 

광해군을 몰아내고 명나라를 받들다 청나라에게 나라를 말아먹었던 노론, 북학파를 탄압하면서 3백년간 조선의 지배계급이었던 노론, 일제의 강제점령앞에서 그들이 선택한것은 민족반역자였다.

대를 이은 그들의 기득권은 친일로 유지됐다. 이병도, 이완용, 을사오적 등 대표적 민족반역자가 노론이다.

 

광복 후 뿔뿔히 흩어져 위기에 몰린 민족반역자들이 선택한 것은 '반공', '친미'였다. 장택상,정일권,김창룡,노덕술 같이 경찰,군인,학계,문화계,언론,종교등 다양한 분야에서 지도자격인 민족반역자가 셀 수도 없이 많았다.

 

같은 시기에 일제의 탄압에 가산을 탕진하고 온갖 고초를 겪었던 독립운동가와 그 자족에 비해 민족반역자들의 후손은 선대가 만들어준 기득권으로 근대적 교육의 기회를 누리거나 유산 상속 등으로 그 출발부터 남달랐다.

 

'독립운동가 집안은 3대가 망하고 친일파집안은 3대가 흥한다'라는 말이 가슴속 응어리가 되는것 같다. 

 

 

얼마전 부터 우리나라 역사책에 빠져있던 꼬마의 시대는

고조선과 고구려 백제 신라를 지나 조선, 그리고 일제강점기에 머물고 있다.  

청산리전투에 대해서

홍범도와 김좌진장군에 대해서

3.1운동과 유관순에 대해서

김구와 윤봉길, 안중근, 이봉창에 대해서

일제의 탄압에 대해 살아있는 3D 역사책이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좁지 않은 주차장인데도 불구하고 진입하는데 까지 시간이 꽤 걸렸다. 주말이기도 하고 8월이라 더욱 사람들이 많았다.

입구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관람을 하게 되는 서대문 형무소 역사 전시관,

서대문 형무소 둘러보는 TIP, 서대문 형무소를 온전히 둘러 볼려면 2시간 이상이 걸린다. 그러나 이 넓은 형무소에서 관람객들이 이용할 수 있는 화장실은 딸랑 하나 밖에 없다.관람중에 화장실 가기에는 동선에 따라 거리가 있기 때문에 관람전에 다녀오는것을 추천한다. 

화장실에 다녀오는 길, 붉은 벽돌의 옥사 앞에서 포즈를 잡는 꼬마

책에서만 봤던 독립운동가를 직접 만나는 시간이다.

 

역사 전시관을 들어가면, 한일병탄이 되는 과정들이 연도별로 나와 있다.

 

원래의 서대문형무소 건물은 허물어 졌고 아파트와 주차장들이 들어섰다. 지금은 남아 있는 모습은 1/3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광복후 서울구치소 시절 수형자들이 신던 고무신과 빨랫방망이

 

을사조약 이후 1908년 일제가 만든 경성감옥, 4년 뒤, 서대문감옥으로 이름을 변경했다. 광복후 1987년까지 서울구치소로 활용되었다.

 

안중근, 이봉창, 윤봉길 의사 사진 앞에서

 

수갑

 

발에 채우던 족쇄

 

일제강점기 수감자 노역 시 탈주를 방지하기 위해 허리에 채웠던 무게 5kg의 형구로 '요'라고 불렀다.

1919년 3.1운동 당시 태극기를 대량으로 찍어내기 위해 만들었던 태극기 목각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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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 열사도 만나고

 

 

독립운동가의 수형기록표

현재까지 남아 있는 5천여 장의 수형기록표를 통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순국하신 독립운동가를 기억하고 추모하며, 되새겨 보는 공간이다.

 

가운데 강우규 의사, 1919년 남대문역에서 3대 총독으로 부임하는 사이토 마코토에게 폭탄을 던졌으나 암살하지 못했다. 이 때가 그의 나이 66세였다. 그는 이듬해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집행 됐다.

 

3면에 독립운동가 5천명의 수형기록표가 전시되고 있다. 

 

어린 학생들도 독립을 향한 마음은 한결 같았다.

 

서대문 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 생을 마감한 독립투사들

사형이 집행되던 공간을 재현해 놓은 공간이다.

 

 절명시

단두대 위에 올라서니 오히려 봄바람이 감도는구나

몸은 있으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회가 없으리오

                                                          -강우규-

 

재판을 받기 전 미결로 수감되어 있었던 독립운동가를 일일이 경찰서로 이송하여 취조하는 번거로움을 없애기 위해 고등계 형사를 직접 서대문형무소에 파견하여 이곳 지하에서 취조를 했다고 한다.

 

취조실

 

임시구금실과 취조실, 그리고 옆칸에 물고문과 손톱찌르기 고문이 자행되던 방이 있다.

 

인간으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고문을 자행했던 일제,

그 가운데는 노덕술같은 한국인 고등계 형사도 있었다.

 

태형 집행시 사용되었던 형벌 도구

 

지하 독방

 

독립운동가 들이 당했던 고문을 체험 할 수 도 있다.

 

벽관 고문, 옴짝달싹할 수도 없이 좁은 공간에 사람을 감금해 앉을 수도 움직일 수도 없는 고통을 주었던 고문도구, 벽에 서 있는 관이라 해서 '벽관'이라 불렀다.

 

 

밥 찍는 틀, 수감자들의 밥을 펐던 밥틀로 밥량을 조절할 수 있도록 받침의 두깨가 각기 다르게 되어 있다.

 

수감생활 기록과 의식주를 전시하는 공간

 

12옥사 먹방

12옥사 내부에 설치됐던 독방, 한 사람이 겨우 누울 수 있는 0.7평의 공간, 내부는 24시간 내내 빛이 한줌도 들어오지 않아 마치 먹물처럼 깜깜하다 하여 '먹방'이라 불렀다.

마룻바닥 끝부분에 구멍을 내어 용변을 밖으로 처리하게 하는 등 외부와 철저히 격리된 공간이다.

이곳에 감금되면 정신공황장애를 겪기도 하는 등 상상 이상의 고통이 뒤따랐다.

 

 일제는 항일독립운동을 탄압하고자 애국지사들을 특수범죄자로 분류해 독방에 투옥시킨 후 고문과 폭행을 일삼았다.

 

감방 내부에는 위급한 상황을 간수에게 알리는 버튼이 있다. 

 

감방안 나무 버튼을 누르면 이렇게 밖으로 나무가 밀려 내려 온다.

 

꼬마는 이것 저것 하나도 빠짐 없이 보고 듣고 만져본다.

 

 

서대문형무소 중앙사, 중앙사는 10,11,12옥사와 연결되어 옥사 전체를 감시 통제했던 1920년대 건물 원형이다.

관람 동선을 따라 옥사 반대쪽으로 출구가 있다.

 

옥사를 빠져 나오면 옆에 있는 유일한 화장실

 

관람방향을 따라 다음 옥사로 향한다.

 

고난의 역사에도 독립과 민주화를 이루어낸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민주화 운동을 하다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신 민주인사들을 만날 수 있다.

 

한국전쟁 당시 훈남이었던 백기완 선생님 

 

서대문형무소 두번째글 보기

 

서대문형무소, 살아있는 역사책_두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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