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처럼 긴 장마는 처음인것 같습니다. 지겨운 장마가 끝나는 듯 하더니 다시 코로나가 전국을 옭아맵니다. 이래저래 다니기도 힘들고 그렇다고 집에만 있기에는 더더욱 힘든 가련한 시절입니다. 당분간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를 피해 산이나 들 같은 자연을 찾아 다녀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은 얼마전에 다녀온 연천 여행 입니다. 서울에서 가깝다면 가깝고 멀다면 먼 어정쩡한 거리, 집에서는 두시간이 걸리더군요. 얼마전 까지만 해도 연천 하면 연상되는 단어가 접경지대, 군인들, 지뢰밭 같은 살벌한 것 들이었습니다. 그럴수 밖에 없었던게 경기도 포천과 파주, 철원 사이 DMZ와 경계를 이룬 탓이기 때문이죠. 이런것만 빼면 사방이 산으로 둘러쳐 져 있고 넓은 평야과 깍아지른 절벽의 한탄강과 임진강이 있어 한번쯤은 살아보고 싶은 곳이기도 합니다.
연천 가볼만한곳
연천은 임진강과 한탄강을 끼고 있어 경치 좋은 캠핑장이 많고 한탄강 협곡으로 떨어지는 재인폭포와 최근 sns 인생사진 찍는곳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고구려와 백제 신라의 격전지였던 호로고루성, 그리고 신라의 마지막 왕이라는 오명을 쓰고 임진강변에 묻힌 신라 57대 경순왕의 무덤 등이 유명한 스팟 입니다.
대개 동선을 남쪽에서 북쪽으로 경순왕릉-호로고루성-재인폭포로 정하던지, 아니면 북쪽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는 동선도 좋습니다.
천년 신라왕 중에 경주에 묻히지 못한 유일한 왕 경순왕
첫번째 여행지는 경순왕릉입니다. 무기력하게 굴복한 신라의 마지막 임금이라는 오명을 쓴 신라 57대 왕 경순왕 입니다. 당시 후백제 견훤의 침략으로 영토는 계속 줄어들고 국가의 기능이 완전히 마비된 와중에도 귀족의 권력 다툼이 끊이지 않는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천년 신라의 기세가 기울어지는 상황에서 백성들의 안전을 위해 항복을 선택한것은 현명한 판단이라는 역사적 평가에 힘을 실어 봅니다.
경순왕릉은 주차장에서 도보로 5분 정도 거리에 위치해 있습니다.
경순왕은 신라를 고려 태조에게 바치고 왕건의 딸인 낙랑공주와 정략결혼을 하고 개성에서 생을 마감했다고 합니다. 전하는 바에는 경순왕의 운구행렬이 경주로 가기 위해 이곳 임진강 고랑포에 이르렀을 때, 고려 왕실에서 "왕릉은 개경 100리 밖에 쓸 수 없다".라는 이유로 막았다고 합니다. 이는 후삼국을 통일하고 왕권을 확립해가던 고려가 경주에서 치러질 장례로 자칫 민심이 동요할 가능성을 염려했던 것으로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경순왕릉은 왕릉으로서 곡장(능,원,묘 따위의 무덤 뒤에 둘러쌓은 나지막한 담)을 두르는 격식은 갖추었지만, 이곳 고랑포 북쪽 언덕에 자리잡아 신라 왕릉 가운데 경주 지역을 벗어나 있는 유일한 능이 되었다고 합니다.
비각 안 신도비를 자세히 보면 얼굴 형상이 나타나고 한자가 10자 정도 보인다고 하는 글귀를 붙여 놨네요,
신도비를 자세히 들여다 봅니다. 뭔가 절규하는 표정이 살짝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남한에서 볼 수 있는 유일한 고구려성 호로고루성
경순왕릉에서 5분거리에 있는 호로고루성 입구에 세워진 고구려 광개토대왕비 입니다. 물론 복제품입니다. 가장 넓은 영토를 다스렸던 광개토대왕비는 비록 복제품이라 하더라도 호탕하고 늠름한 기상을 느낄 수 있습니다.
입구 전시관에는 호로고루성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출토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고요. 해설사분의 해설도 들을 수 있습니다.
출토된 유물들
임진강변쪽으로 남아 있는 호로고루성벽 입니다. 지금의 성벽은 고구려가 쌓았던 현무암 성벽 위에 신라가 다시 쌓은 것이라고 합니다.
호로고루성은 개경과 한양을 연결하는 길목, 임진강변 주상절리 절벽위에 있어 천혜의 방어요새였습니다. 강건너 맞은편 백제의 이잔미성이 서로 대치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또한 이 곳은 임진강 하류에서 배를 타지 않고 강을 건널 수 있는 최초의 여울목에 있다고 합니다. 장마철을 제외하고는 길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고 합니다.
성은 북동쪽에서 남서 방향으로 흐르는 임진강의 천연절벽에 위치해 있는데, 성벽의 전체 둘레는 401m, 내부 면적은 606㎡이라고 합니다. 동쪽벽은 다른 고구려의 성 처럼 여러번에 걸쳐 흙을 다져 쌓은 위에 돌로 성벽을 높이 쌓아 올려 토성과 석성의 장점을 결합한 축성술을 보여준다고 합니다.
요즘은 인생사진을 찍는 커플들의 핫플레이스가 된 것 같습니다. 고구려가 멸망하지 않고 1% 양반의 성리학이 지배했던 조선이라는 나라가 생기지 않았다면 지금의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재인폭포
얼마전에 재인폭포를 비롯 한탄강 일대의 주상절리들이 유네스코 지질공원으로 등재됐다고 합니다. 재인폭포는 가마골 입구에 18.5m높이의 폭포로 고을 원님의 탐욕으로 인한 재인의 죽음과 그 아내의 강한 정절이 얽힌 전설로 알려졌다고 합니다.
재인폭포 전설
옛날 어느 원님이 이 마을에 사는 재인 아내의 미색을 탐해 이 폭포 절벽에서 재인으로 하여금 광대줄을 타게한 뒤 줄을 끊어 죽게 하고 재인의 아내를 빼앗으려 했으나 절개 굳은 재인의 아내는 남편의 원수를 갚기 위해 거짓으로 수청을 들며 원님의 코를 물어 뜯고 자결했다고 합니다. 그 뒤부터 이 마을을 재인의 아내가 원님의 코를 물었다 하여 '코문리'라 불리게 디었으나, 차츰 어휘가 바뀌어 '고문리'라 부르게 됐다는 전설입니다.
반면 이런 전설도 있다고 하는데요, 한 재인이 있었는데 하루는 마을 사람과 이 폭포 아래에서 즐겁게 놀게 되었으나, 자기 재주를 믿고 흑심을 품은 재인은 그 자리에서 장담하며 약속하기를, '이 절벽 양쪽에 외줄을 걸고 내가 능히 지나갈 수 있다!'라고 호언장담하자, 마을 사람은 재인의 재주를 믿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자기 아내를 내기에 걸게 되었다. 잠시 후 재인은 벼랑 사이에 놓여 있는 외줄을 타기 시작했는데, 춤과 기교를 부리며 지나가는 모습이 평지를 걸어가듯 하자 이에 다급해진 마을 사람은, 재인이 줄을 반쯤 지났을 때, 줄을 끊었고 재인은 수십 길 아래 구렁으로 떨어져 죽게 됐다. 이런 일로 이 폭포를 재인폭포로 부르게 됐다.'라고 기록되어 있다고도 합니다.
서로 다른 전설이지만 줄타기를 잘 했던 재인이 다른 사람의 시기로 떨어져 죽게 됐다는 이야기는 같네요. 코문리는 좀 우끼기도 한데 그게 더 진짜 같네요.
이번 장마기간동안 재인폭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록 물이 가득 찼다고 합니다. 폭포 바로 아래에 한탄강댐이 있어서 물을 막은게 이유죠.
마지막으로 기념사진을 남기고 다시 집으로 돌아갑니다. 어서 어서 코로나가 물러가고 파란 가을 하늘을 마주 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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