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 최고의 격전지 초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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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전체가 요새였던 강화도

강화도는 한양과 가까운 지리적 조건으로 수 많은 외침을 받아 온 곳 입니다. 강화도 전체의 해안선을 따라 6개의 문루와 6개의 암문이 있는 외성을 쌓고, 17개의 수문을 만들었습니다. 강화도에는 5진 7보 53돈 8포대 8봉수 4요망대가 설치 됐는데요, '진'과 '보'는 군사적 요충지에 설치된 군사주둔지로 '진'은 오날날 대병력이 주둔하는 곳이며, '보'는 중대병력이 주둔한 곳입니다. 그리고 '돈대'는 조금 높은 평지에 초소를 설치한 곳이었으며, 포대는 말그대로 화포를 쏘기 위한 곳이며, 봉수는 봉화를 올렸던 곳 입니다.   

그 중에서 초지진은 강화 최남단에 위치해 서해를 통해 들어온 외선들이 한양으로 들어가는 첫 번째 관문입니다. 1866년 강화로 들어온 프랑스군에 의해 함락되기도 했으며 1871년 신미양요때는 레밍턴 소총과 박격포로 무장한 미군들과 격전을 벌이며 많은 피를 흘렸던 곳입니다.

그리고 1875년에 일본군 운요호의 포격에 또 다시 초토화가 됐습니다. 운요호 사건으로 굴욕적인 강화도조약을 체결하게 되고 결국 한일합방으로 국권까지 뺏기게 되고 말았죠.

이렇게 외세의 공격에 속절없이 무너진채 '돈'의 터와 성의 기초만 남아 있던 것을 1973년 겨우 초지돈만 복원해 온전한 본모습은 찾지 못하고 지금까지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초지진에는 여전히 그 날의 포탄 자국이 소나무와 성벽에 남아 민족시련의 뼈아픈 기억을 되살리게 합니다.

현재 초지진에는 3곳의 포좌와 100여곳의 총좌가 있고 조선 말의 대포 1문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초지진 성곽에 올라서면 강화해협 건너 김포 대명항이 손에 닿을듯 가깝게 보입니다. 

전체 초지진의 모습은 사라지고 초지돈만 복원된 모습입니다.

포탄 흔적이 남아 있는 소나무와 성벽이 지금까지 보존되어 있습니다. 

400살이 넘은 노송에는 100년이 넘도록 움푹 패인 포탄 자국이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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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으로 날아온 미제의 포탄은 얼마나 공포스러웠을까요

어른 700원, 청소년 어린이 500원의 입장료를 내고 들어갑니다.

그리 넓지 않은 돈대의 모습입니다. 가운데 포를 전시한 포각이 있고 사방으로 성이 둘러져 있습니다. 

당시 초지진에는 병마첨절제사 한명에 군관 11명, 군사 320명, 전선 3척이 주둔했다고 합니다. 

조선말기 사용됐던 대포랍니다. 지금처럼 포탄이 발사되어 폭발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포탄이 날아가는 정도로 큰 위력은 없었다고 합니다.

사정거리 700m, 100mm구경, 무게 1.8톤

대포를 설치한 포좌 입니다. 안으로 들어갔다 머리를 쾅~

2002년 개통한 강화초지대교가 포문을 통해 보입니다.

미스터 션사인 첫 화에 나왔던 신미양요 전투 장면, 그 가슴아픈  이야기가 담긴 곳, 초지진을 돌아보는 것으로 강화도 당일 여행을 마치고 초지대교로 아웃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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