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수산성에서 남한산성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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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영화 '남한산성'을 봤습니다. 척화파 김상헌과, 화친파 최명길의 팽팽한 설전, 청군의 공포와 인조의 나약함, 추위와 굶주림을 그린 남한산성에서의 45일을 그린 영화 입니다.

그런데 인조는 왜 하필 고립무원의 남한산성을 택했을까요? 얼마전 김포 문수산에 갔다가 알게된 영화 '남한산성'에 나오지 않은 이야기 입니다.

문수산에서 바라본 강화도와 강화대교의 모습입니다. 갑곶진은 강화대교 건너자 마자 있는 언덕에 위치해 있습니다. 강화와 육지를 연결하는 나루터가 있어 전략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곳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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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과 문수산성 그리고 남한산성

1636년 12월 8일 기마병이 주력이었던 청군은 압록강을  넘은지 5일만에 한양을 점령 했죠,  아무런 대책없이 우왕좌왕하던 인조는 질풍처럼 다가오는 청군을 피해 강화도로 피난길에 나섰다고 합니다. 강화도는  사방이 갯벌로 덥혀 있어 기마병이 따라 올 수 없는 섬으로 천혜의 요새나 다름없었습니다. 

또한 해안을 따라 12개의 방어기지인 '진'과 53개의 대포를 쏠 수 있는 성곽인 '돈대'가 있었던 전략적 요충지 이자 왕의 별궁인 행궁과 상당한 군량에 화약까지 비축되어 있는 유사시의 피난처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청나라는 이미 고려에서의 경험을 통해 강화도로 피난갈 것을 예상하고 강화도로 가는 길목을 막았죠, 이에 큰 역할을 했던 것이 문수산성이 있는 김포 문수산 입니다.

강화도의 갑곶진을 마주보고 있는 해발 376m 문수산은 강화의 갑곶진과 함께 강화 입구를 지키는 성 입니다.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과 치열한 격적을 치른 곳 이기도 하죠.

인조가 강화도로 피난갈 것을 미리 예상한 청군은 무리하게 남하해서 문수산성을 점령했습니다. 그런 후 청군은 문수산성과 갑곶진 사이로 흐르는 염하강이 얼어붙자 강을 건너 아무 저항없이 강화도를 점령했습니다. 당시 강화의 총사령관인 김경징은 아무 걱정할 것 없다며 큰 소리 쳐 놓고 홍위포를 압세운 청군의 상륙에 혼비백산해 뇌물로 쌓아 놓은 금은보화를 들고 도망갔던 인물입니다.

세자빈과 봉림대군을 비롯한 왕족 대부분이 포로로 잡히고 강화도로 피난길에 올랐던 인조 또한 남한산성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죠, 결국 45일만에 삼전도의 치욕적인 국치를 겪게 됐죠.

문수산성에서 남한산성을 생각하다.

문수산은 일부 구역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군사시설이 있어서 통제구역입니다.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고 다시 염하강이 합류해 서해의 교동도 까지 가는 한강하류를 옛날에는 조강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문수산에서 바라본 북한 개풍군 해창리, 사실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남과 북이 총구를 겨누고 소란스러운 방송이 연일 쏟아지는 고요하면서 시끄러운 동네입니다.

한강을 경계로 남쪽은 남한, 오른쪽은 북한의 황해도 개풍군 입니다.

북한의 대남 최전방 지역인 황해도 개풍군, 하조강리입니다. 강을 따라 철책이 이어지고 언덕과 산봉우리 곳곳에 북한군의 초소와 벙커가 숨어 있습니다. 

북한 판문리 하조강리 해변 입니다. 통일이 되면 멋진 리조트가 들어설 자리같습니다. 

병자호란과 인조

선조와 함께 무능한 왕 1.2위를 다투는 인조와 병자호란은 국제정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함과 대국에 지나치게 의존했던 편향된 정치의 결과입니다. 

그런데 명과 청의 대결 속에서 일어난 병자호란이 400년이 지난 지금은 중국과 미국, 일본, 러시아에 남과 북의 대결로 이어진것 같습니다. 스스로를 지키지 못하는 나라의 앞날은 어떨까요?   

문수산에 올라 눈앞의 강화도와 북녘땅을 바라보며 병자호란과 남한산성의 인조 이야기 까지 하게 됐습니다. 과거를 알지 못하면 미래도 알 수 없는 법이니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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